진흙으로 빚은 실존…'천재 조각가'의 예술혼을 만나다

입력 2022-03-23 17:13   수정 2022-03-24 00:32


“진흙을 씌워서 나의 노실(爐室·가마가 있는 작업실)에 화장하면 그 어느 것은 회개승화(悔改昇華)해 천사처럼 나타나는 실존을 나는 어루만진다.”

현대 조각 거장 권진규(1922~1973)가 남긴 시 ‘예술적 산보-노실의 천사를 작업하며 읊는 봄, 봄’의 한 구절이다. 작업실의 작은 우물에서 물을 길어 올린 뒤 진흙을 빚고 석고 작업을 거쳐 가마에 구워내는 지난한 과정을 거치면, 초라한 물질도 예술적 이상을 담은 작품으로 승화한다는 작가 의식이 드러나 있다. 대중의 몰이해와 생활고 속에서도 그는 결코 현실과 타협하지 않았다. “절지(折枝)여도 포절(抱節)하리다. 포절 끝에 고사(枯死)하리라”(가지가 꺾여도 절개를 지키며 말라 죽겠다)는 시의 도입부처럼….

24일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에서 권진규 탄생 100년과 작가 유족들의 작품 대량 기증을 기념하는 전시 ‘노실의 천사’가 개막한다. 조각 등 오브제 137점, 아카이브와 드로잉 36점 등 총 173점을 소개한다. 사상 최대 규모의 권진규 전시다.

권진규는 ‘비운의 천재 조각가’로 불린다. 동시대 사조에 휩쓸리지 않은 독창적 예술세계와 비극적인 최후, 유작을 둘러싼 법정 다툼, 한·일 양국 교과서에 실릴 정도의 미술사적 중요성 때문이다. 하지만 전시는 이런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그를 ‘성실한 장인’으로 조명한다. “권진규는 조각가가 아니라 장인을 자처했다”는 게 외조카인 허경회 권진규기념사업회 대표의 말이다. 백지숙 서울시립미술관장은 “성실한 예술가였던 권진규의 삶을 입체적으로 조명하기 위해 최대한 많은 작품을 펼쳤다”고 했다.

전시 1막 도입부에서는 사찰 입구에서 현실과 피안을 나누는 일주문(一柱門)을 형상화한 목조각 ‘입산’(1964~1965)이 관객을 맞는다. 이어 권진규가 일본 무사시노미술학교에서 조각을 배우던 시절의 대표작들이 등장한다. 권진규의 스승은 현대조각의 선구자 앙투안 부르델의 제자인 시미즈 다카시 교수다. 부르델이 오귀스트 로댕의 제자이기 때문에 권진규는 로댕의 증손제자뻘이다. 졸업하던 해 일본의 유명 공모전에서 특선을 수상한 석조각 ‘기사’(1953)에서 그의 탁월한 재능을 엿볼 수 있다.

귀국 후 그는 테라코타를 주재료로 삼아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한다. 전시 2막에서는 중·고교 교과서에 수록된 권진규의 대표작 ‘지원의 얼굴’(1967)을 비롯해 ‘선자’(1966) 등 홍익대 강사 시절 제자들을 모델로 한 사실적인 조각들을 만날 수 있다. 살짝 내려앉은 어깨와 긴 목, 먼 곳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영원에 도달하려는 권진규의 갈망이 담겨 있다. 한희진 학예연구사는 “작가는 리얼리즘보다 영원성을 추구했다”며 “오래도록 남는 테라코타를 재료로 삼은 것도 이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경외감을 불러일으키는 그의 작품들은 당시 대중에게 철저히 외면받았다. 전시 3막에 나와 있는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1970)가 단적인 예다. 교회의 의뢰로 제작했으나 분위기가 너무 비통하다는 이유로 퇴짜를 맞았다. 거듭되는 개인전 실패와 생활고 속에서도 그는 테라코타보다 더욱 오래 가는 전통 제작기법인 건칠 작업을 시작하는 등 묵묵히 작업을 계속했다. 그의 건칠 부조 ‘망향자’(1971)에서는 처절한 예술혼을 느낄 수 있다.


우울증에 시달리던 그는 1973년 작업실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전시 마지막 작품은 테라코타 ‘가사를 걸친 자소상’(1969~1970)이다. 작가 자신이 승려의 법의(法衣)를 걸친 모습에서 현실에 발을 딛고 영원을 추구하는 그의 깊은 고뇌를 엿볼 수 있다.

전시 공간이 넓지 않은 데다 작품 수가 워낙 많아 분위기가 다소 산만하지만, 작품으로 빽빽한 좌대가 그의 성실한 면모를 더욱 부각시킨다. 매주 목요일과 토요일 허경회 대표와 허명회 고려대 명예교수가 특별 도슨트 ‘나의 외삼촌, 권진규’를 진행한다. 전시는 5월 22일까지.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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